보는 사람들을 위한 눈먼 사람들에 대해 쓴 글 (뉴스페이퍼 1호, 2020)

2021. 3. 8. 17:06Writing

2020.12.28 <뉴스페이퍼> 에 수록.

 

 

 

보는 사람들을 위한 눈먼 사람들에 대해 쓴 글                                

서예원


#. 사과나무가 불에 휩싸여 활활 타오른다. 화마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고,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누군가 덤덤히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거친 불길이 사라진 후, 하얀 재가 남은 곳에는 눈만이 반짝이고, 뱀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면서 타다만 재를 끈다.
#. 축축하게 비가 오는 날, 미끈한 것으로 뒤덮인 아이의 손과 발을 잇달아 되만 지는 장면.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아이에게 아빠는 늪 바닥에 뱀이 산다고 겁을 준다. 늪에 다가가서는 안 되고, 발이 있는 것들은 다시는 그곳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한다.
겨울날, 저 멀리서 어머니를 보았지만, 곧장 늪 바닥으로 빠져들어갔고, 그 모습은 정신없이 흔들리고 갈라진다.

 지난봄, 그곳에서 본 장면은 반짝이는 하천이 흐르는 수풀 속에서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사람이다. 햇빛이 쨍할 때면 마침 그가 들고 있던 큰 거울 때문에 간혹 그가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언뜻 방울 소리가 들리면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볼 수는 없었지만, 카메라 화면 너머 또렷이 응시하는 눈만이 나와 몇 번이고 마주쳤다. 다소 매서운 눈빛으로 봤을 때 여인인 듯하였고, 그녀는 시선은 계속 정면으로 나를 향했다. 

 송세진 작가의 <포기한 작업으로부터>(2020, 하이트컬렉션 예정) 영상 속 퍼포머-신체는 반짝거리는 것들로 연결된 기다린 줄과 우거진 수풀 더미 사이에서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다. 발, 손끝, 신체 선, 옷감, 눈 하나하나 카메라 화면에 잡힌다. 이내 마네의 <올랭피아>와 영화 <싸이코>의 여성 이미지가 교차한다. 
 시각 미술에서 상징적인 재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 <올랭피아>. 이 저명한 근대 작품이 보여주는 ‘이미지’와 ‘시선’의 역학은 보는 욕망에서 비롯하는 ‘관음적 태도1)와 시각적 쾌락/공포2)’와 결부한다. 근대에 여성의 신체는 (남성)주체의 통제 가능한 시각에서 대상화되는 것으로 가부장적 초점이 투과된 전형적인 원근법 구도로서 재현되었지만, <올랭피아>의 출현은 그런 위계적이고 고정된 시각에 균열을 가하는 최초의 그림이었다. 당시 여성이 타자의 이미지로 고정된 배경에는 (남성)주체가 자신의 시선을 허용하고 또 방해받지 않는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 그들의 이러한 전능한 태도의 기저에는 ‘구경’과 ‘관음’이 상호적으로 위치했고, 쾌락과 안정을 위해 여성의 몸은 죽은듯한 수동적인 몸이 되어야 했다. 이에 반해 <올랭피아>의 여성 이미지는 관람자의 관습적인 원근법적 시각을 해체하고, 전지적인 상징 질서와 인식을 동요하게 한 것이다.3)
 이러한 자기 성찰성을 지닌 여성의 이미지, 즉 정면을 바로 응시하는 매섭고 당당한 눈과 프레임에 수평하는 시선은 퍼포머-신체의 고요한 몸으로 대조되지만, 그럴수록 응시하는 눈빛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 눈빛은 강한 주체의 응시에 맞대어 상대를 전복하려는 이항 대립이라기보다는 중립적인 바라봄이다. 중립적인 시선은 곧 맞닿은 두 손이 유리알과 스팽글을 쏟아내고 서로 그것을 이어받는 몸짓으로 이어진다. 
 다시 <올랭피아>의 신체 장면에 주목해본다. 이 여성의 누드는 햐앟고 기이한 병적인 몸으로 불완전하며 모호하다.4) 자연스럽지 못하고 불안전함에서 오는 감각은 위계 자체가 전형이 된 시각에 변칙의 가능성이 내재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에로틱한 대상으로서 매춘부의 몸이 아닌, 관람자에게 위협과 수치를 가하는 본능적인 몸이 된다. 이러한 페티시적 메커니즘은 퍼포머-신체와 다시 연동되는데,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긴 바지를 입은 수풀 속의 퍼포머는 어떠한 페티쉬적 전용도 적극적으로 이어받지 않으려는 듯하다. 그리고는 반짝이는 것들로 영상 밖 관람자에게 빛을 반사한다. 빛의 굴절과 화면의 전환이 계속 이루어진다. 
 뒤이어 영화 <싸이코>의 대표적인 푸티지 중 하나인 죽은 여인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여주인공 마리온이 샤워 도중 남성에게 피살당할 때, 그녀의 언캐니한 ‘눈’은 정지되어 클로즈업된다. 그간 히치콕 영화 속 여성 이미지에 대한 여러 비평이 있었지만, 대개 남성 편협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텍스트에 종속된 채 한계적으로 제시되어왔다.5) 그러나 작가는 이 죽은 여성의 눈을 통해 서사 속 여성의 재현 방식이 폐쇄적 혹은 기존의 남근적 텍스트에 고정되지 않으며, 마주 보는 서로가 조심스러운 중립이 되도록 넌지시 표한다. 다른 트랙으로 전개되는 작가의 픽션 서사나 상징적인 은유, 그리고 이전 올랭피아의 서사들을 상기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영상 세계 안에서 카메라의 시선 자체(화자, 남편 노먼)가 따라 보는 사람 또한 전지적 영향을 갖게 한다는 로라 멀비의 언급6)에 기대어, 지배적인 시선 방식에 의해 다른 한쪽이 모순적으로 젠더성이 정립되지 않게 하도록 우리에게 제안한다. 젠더에 대한 동정도, 여성 오이디푸스도, 성차를 직면하는 것도 아닌, 누군가의 일방적인 모순으로 가치를 끌어내리도록 하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후드를 쓴 사람은 끝이 잘 보이지 않는 긴 수풀 길을 걸어간다. 반짝이는 줄이 걸린 나무 지팡이를 쥔 뒷모습은 비장한 듯하지만 무심할 정도로 덤덤하다. 어떤 것도 발설하지 않는 그저 덤덤한 존재감 자체만을 확인하게끔 하게 한다. 그리고 카메라 밖으로 향하는 눈의 응시와 빛을 통해 우리에게 여전히 전환의 제스처를 취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듣고 참여했지만, 작업은 결국 보지 못하고 쓴 글이다. 올해 목도한 수많은 것들이 있다. 당연히 누려왔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봤어야 했지만 다시 언제 볼지 모르는 지연된 것들, 마땅히 지키고 존중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들. 감추었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들. 인지하지 못하다 정지했을 때 비로소 보게 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19세기 살롱전 때와 사실 크게 달라진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술과 관계하면서 매번 쉽지는 않지만, 어떤 순간을 목격하고 계속 포착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오늘을 기록하고 내일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 올해가 지나면 우린 다음 새로운 가치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가려졌던 것 사이에서 덤덤히 수용하고 더 나아질 수 있기를. 그런 순간이 오길 기다린다.

 

 

 

1) Charles Bernheimer, ‘Manet's Olympia: The Figuration of Scandal’, Art and Literature II, vol. 10, no. 2, (Summer, 1989), pp. 255-277
2) ‘눈의 욕망’인 ‘시각적 쾌락’은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말한 ‘훔쳐보는 즐거움’으로 환상 및 충동성과 연결되며, 본능적이고 독립적인 성영역으로 간주된다. 쇼히니 초두리, 『페미니즘 영화이론』, 앨비, 2012, pp. 67-68
3) 할 포스터 외, 『Art Since 1900』, 배수희 외 옮김, 세미콜론, 2007, p. 84, 김인숙, 「관음적 시선에 의한 여성 누드 이미지의 변증법적 전개 연구」, 한국기초조형학회, vol.16, 2015. pp. 145-155에서 재인용
4) Charles Bernheimer, ‘Manet's Olympia: The Figuration of Scandal’, p.263
5)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감독의 <싸이코>는 페미니즘 영화 이론의 진영을 자극하고, 담론 형성과 실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영화이다. 로라 멀비(Laura Mulvey)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1975)에서 남성의 관음주의가 여성을 묘사하는 사례로서 히치콕의 영화들을 제시했고, 이어 레이몬드 벨루(Raymond Bellour)가 나르시즘적이고 도착적인 서사와 연출 방식에서 기인한 견해를(1986),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는 영화 <새>를 통해 거울 이론과 연관하여 여성을 캐릭터를 논하였다(1988). 이후, 타니아 모들스키(Tania Modleski)는 <레베카>를 예로, 여성 혐오와 동정은 양가적으로 드러난다는 기존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1988). 서인숙, 『씨네 페미니즘의 이론과 비평』, 책과길, 2003, pp.213-262
6) 로라 멀비, 『1초에 24번의 죽음』, 이기형, 이찬욱 옮김, 현실문화, 2007, 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