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7. 02:34ㆍWriting
2020.10.5
서교예술실험센터. 이성직 <아프면 낫는다 건강백세!> 2020.7.28-8.8
기록하기, 지우기, 기억하기, 다시 존재하기
서예원
꽤나 텅 빈 공간. 랩탑과 책 몇 권이 놓인 테이블, 랩탑에 연결된 프로젝터 화면. 테이블 쪽을 녹화하는 카메라, 다른 쪽에 놓인 작은 빔프로젝터에서 나오는 작가의 지난 렉처 퍼포먼스 영상. 투명 시트지로 싼 벽 한 쪽면, 그 위에 덤덤히 써 나아가는 작업 다이어그램. 전시장 모퉁이에 재배 중인 식물과 그가 수기로 기록한 작업 노트 한 권. 이 전시/공연이 그려지는 공간의 풍경이다.
작가는 전시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문다. 항상 해왔던 방식으로 랩탑과 책 몇 권을 두고 작업 구상을 하고, 마지막 날에 있을 퍼포먼스를 준비한다. 지난 작업에 등장했었던 ‘이명숙’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을 이어나가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과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시트지 벽 위에 기록한다. 작업의 핵심 서사 축이기도 한 ‘이명숙’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수행적인 단서와 기록물을 조합해감에 따라 유추할 수 있다. 전시 일자가 하루하루 더해질수록, 관객이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를수록, 우리는 그녀를 점차 알아갈 수 있다.
‘이명숙’이라는 인물은 구전된 텍스트의 형식으로 등장한다. 전시장에 놓인 작업노트에 간단히 서술된 몇 년 전 돌아가신 친할머니 이명숙은 작가의 엄마와 동생으로부터 문제적인 가족 구성원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매번 가족들 간의 불화를 조장했었고(했다고 여겨지고), 갈등과 문제 들을 봉합하지 못한 채 가족이라는 제도에 가까스로 엮여 있다. 이러한 위태로운 집단 내 환경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성경을 읊거나 본인만의 견고한 주문(“아프면 낫는다, 건강백세!”)을 거는 등 스스로를 아끼고 보살폈으며, 작가는 그런 삶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녔던 그녀를 이곳으로 소환해낸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개념의 경계 끝에 걸쳐진 애매한 이방인인, 그렇지만 개인의 욕망을 뚜렷이 가졌던 그녀를 이 전시/공연의 화자로서 배치하고, 그녀의 미시사를 주요 기제로 작동시킨다.
12일 동안 행해지는 일종의 극과도 같은 이 전시에서 ‘그녀’와 관계하는 서사(telling)는 연속 적인 시간에 따른 반응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전시/공연 수행을 위해 마련한 테이블에서 작가는 ‘성찰하고 연구하는 행위’를 통해 작업을 진전시키고, 더듬고 틈을 찾아내는 ‘톺는 행위’를 통해 작업의 전제 조건을 정리하며 현재-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가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은 테이블 맞은편 큰 벽면에 이 모든 전시/공연의 조건에서 비롯한 구상과 과정들을 다이어그램으로 연결하여 기록해나가는 것이다. 이명숙에 관한 기억의 파편 또한 이 과정들과 연관되면서 서사의 실체를 드러낸다. 가령 그녀가 삶의 고뇌를 극복하고자 신앙생활을 통해 종교 안에 구축한 허구의 세계를 본인의 공연 제작 조건과 연관시키며 공연의 픽션적 요소와의 상관성을 조망하기도 하고, 그녀가 가족들과 불화를 일으킨 사건을 떠올리면서 전시와 마지막 날에 있을 퍼포먼스의 시간과 장면, 행위를 구체화한다.
이처럼 서교예술실험센터 공간에서 벽면에 하루하루 텍스트를 채워나가는 행위는 공연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동시에 시간을 담보로 하는 수행적인(performative) ‘하기’가 전개되는 장면이다. 그가 연출해내는 장면은 선형적 구조로 서사를 연결하거나 지시적(referential)인 기호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록하기’, ‘지우기’, ‘재배하기’, ‘청소하기’, ‘제의하기’, ‘드로잉하기’, ‘관객과 마주하기’ 등의 몸짓으로 시간을 영위해나간다. 극적인 재현(representation)의 방식과 인과적 관계를 유보하고 ‘실행’1)에 방향을 맞추는 것이다. 다만, 몇몇 장면의 단초로 이명숙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 발화 행위임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전시 시작일에 맞춰 구매한 감자 씨앗은 공간 한켠에 심겨져, 마지막 일정인 퍼포먼스 때 싹을 틔웠다. 전시 중반쯤, 작가는 벽에 ‘수확’의 어원은 ‘돌보다’임을 적시하고, ‘조심하거나 지키면서 기다리다’라는 텍스트를 이어낸다. 이는 이명숙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거시적으로 ‘가족’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연결되게 한다. 전시 초기에 불투명하던 장막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기저 위로 올라온다.
한편, 공연이자 전시로 명명되는 이곳에서 어쩌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핵심적 장치는 ‘카메라’일지 모른다. 작가는 작업 테이블 뒤편에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 전시 동안에 본인의 모든 행위를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관객을 마주할 때면 신체에 액션캠을 매달아 관객 또한 촬영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두 가지 역할로 나뉠 것이다. 한 가지는 ‘전시/공연을 촬영-기록하기’. 다른 한 가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전시/공연 바라보기’이다. 우선, 전시/공연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의 행위 순간과 자취를 시간의 층위로 끌어올리는 것과 같다. 인터넷으로 씨앗 구매하기, 전시장 청소하기, 피자 놓고 제의 지내기, 초상화 드로잉 연습하기, 생각 텍스트로 나열하기 등 그가 하루하루 실행하는 무용한 일은 단순히 의미를 미끄러지는 여타 수행적인 요소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무용한 행위를 촬영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휘발하는 몸짓과 한시적으로 이곳에 존재했던 자신을 아카이브2)하는 행위이다. 무용한 개인의 순간을 담아내는 것. 이것은 지금 여기에서 본인의 현존을 부각하는 동시에 곧장 다시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후에 도큐먼트로 다시 불러내는 행위와 맞닿는다. 마치 이명숙을 소환해내는 일과 오버랩된다. 그가 노트에 적은 그녀에 대한 기억처럼 ‘무용하게 사라진 개인’이자 집단에서 타자로 명명되는 존재를 추적하는 것은 그가 공연을 만들고 행위하고 발화하고 기록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전시/공연을 바라보는 것’은 공연 자체와 인물, 장면, 수행적 요소 등 재현의 시각을 재편성할 것을 시도케한다. 이는 견고한 전통성을 지닌 극장을 비롯하여 시각 예술에서 오랜 재현의 역사, 원근법적 형식이 내재된 시각적 시선에 균열을 가한다. 카메라의 비원근법적인 평면 프레임으로 다시 바라봄은 고정된 시선을 해체하고, 행위와 인식에 대한 주도성을 회복하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마지막 퍼포먼스에서 그는 초를 켜고 피자가 놓인 상을 차린다. 전시 기간 동안 빼곡히 적어 간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지운다. 이명숙에 관한 기억을 소환하여 다시 그리다가 끝내 지움으로써 이명숙에 대한 의미적 완결성에 거리를 둔다. 다시 관객들의 기억과 카메라를 거친 영상물로 재구성되어 완전한 단수로서 정박되지 않도록 하게 한다. 결속된 프레임을 벗어날 때 비로소 존재가 가능성과 역동을 지니는 것처럼, 그 또한 이명숙과의 근간에서 다시 기억되고 편성되기를 희망하면서.
1) 김형기,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지각방식과 관객의 역할』, 푸른사상, 2014, p.95
2) ‘아카이브’에 관한 논문은 무수하지만, 필자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였다. 조선령, 「아카이브와 죽음충동 : 데리다와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한국미학예술학회』, Vol.4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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