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자칼: 데이터는 나를 대리하는가?》 스크리닝 서문

2024. 6. 26. 00:20Writing

일시 | 2024년 6월 23일 (일) 17:00

참여작가 | 박지오, 서기준, 서지수, 홍수진
서문 & 패널 | 서예원

 

 


익명의 자칼: 데이터는 나를 대리하는가?
             

 

 

《익명의 자칼: 데이터는 나를 대리하는가?》 는 문서에 접속한 유저에게 ‘익명의 동물' 이름과 모양을 배정하는 구글문서 시스템에서 착안하여, 대리적 자아가 부여되는 데이터 환경에서 발생하는 주체 관계를 탐구한다. 본 스크리닝에서 데이터는 각각 디지털 시뮬레이션, 편향된 성정체성, 개인의 역사, 냉전시대 유령의 형상을 취한다. 이에 데이터가 자아와 결탁하여 현실에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고찰하면서, 오늘날 미디어 사회에서 어떠한 욕망으로 드러나고 또는 탈각되는지를 살핀다. 동시대에 데이터는 이미 미디어 권력 구조에 깊숙이 자리하면서 일상 세계를 관장하고, 인간과의 의존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우리는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다양한 방식과 협력하는 데이터 주체와 재귀적(recursive) 역할로 상호 보완하며 정치성을 표명한다. 그 역학의 과정에서 박지오, 서기준, 서지수, 홍수진은 데이터가 어떻게 변환되어 존재하는지를 질의하는 동시대의 질문들을 호출하며, 이러한 질문들이 어떻게 의사결정, 행동, 심지어 정체성까지도 모양 짓는지를 영상매체를 통해 시각화한다.

 

 서기준의 <네오-펠로폰네소스에서의 전송>(2024)은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재현한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의 가상현실과 접속하면서 데이터와 상호연결된 사회에 대한 의문스러운 믿음과 위태로운 균형을 드러낸다. 영상 속 가상도시는 상업적 번영을 향한 욕망과 민주정치의 발전적 역사를 통해 거대 제국으로 건설된 그리스 아테네를 배경으로 한다. 무한한 번영과 기술에 대한 환상은 국가 차원의 구획을 넘어, 개인의 신체, 공간, 패턴, 변수 시스템으로 환원되고, 인간의 인식과 감각, 나아가 궁극적인 실존과 주체성에까지 영향을 가한다. 작품에서 특정 가상 세계가 가능성의 공간이 아닌 지배적이고 폐쇄된 공간이라는 가정은 데이터 영속성의 질서에 전복을 암시한다. ‘이진 펄스가 단절된 리듬의 시간’ 밖의 무한한 기술적 낙관론에 대해 우리는 어디까지 동조할 수 있을까. 데이터를 둘러싼 맹목적 믿음과 그것이 초래할 미래에 대한 질문은 아테네 성전 폐허 이미지의 가역적 시간으로 대체된다.

 

 박지오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인간 본성이 구성되는 방식과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본성의 은닉 과정을 퀴어와 퀴어니스의 경계에서 탐구해오고 있다. <모두를 위한 레즈비언 선언문>(2024)은 대중매체에서 부유하는 음절과 이미지를 찾아내어 조합한 일종의 몽타주 선언문이다. 1985년에 발표된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문’을 재차용하여 2024년 한국사회에서의 여성 퀴어 주체의 위치를 영상 언어로서 제시한다. 젠더가 동등한 수준에서 구분되기보다 남성과 비-남성으로 구분되는 국내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어떠한 기준이나 오해가 될 만한 여지조차 없이 탈각되고 사라진다. ‘핀(데이터)’에 귀착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러한 존재들은 언어와 이미지, 움직임으로 붙잡히지 못한 채 망 사이로 빠져나가 탈락된다. 작가는 작품에서 음절과 언어로 존재하지 못하는 소리 덩어리와 클립 조각을 본래 정치적 붙잡힘이 불가한 존재 자체로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포획하기를 시도한다. 광케이블 아래 잔존하는 이들 데이터를 모아 매끄럽지 않고 우연하게, 무용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운동을 만들어낸다. 한편 <무덤에서 요람까지>(2024)는 퀴어 여성의 운명적 탄생에서부터 현재 퀴어사회를 좌표하는 타임라인과 퀴어혐오자의 현재와 탄생을 역순 타임라인으로 연결한 영상이다. 이 두 타임라인은 대비되는 관계를 이루다가도 어느 한 기점에서 하나의 선상으로 공존함을 보여준다. 

 

 ‘역사의 폭압'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현대의 재앙과 역사주의적 오류를 다루는 홍수진은 <No.157>(2024)에서 남북전쟁 중 남한군에게 포위되어 심문을 받은 ‘유춘호'라는 인물을 조망한다. 미군과의 합의 하에 통역된 기록 보고서 ‘ADVATIS’에서 그는 ‘정보 제공자’로 명명되지만, 또 다른 군학복합체 ‘HRRI’ 보고서에서 그는 심문조서에서 통용되고는 하는 ‘정보원'이 아닌 ‘나'로 표기되었다. 구술 증언처럼 보이는 이 보고서는 사실 ‘ADVATIS’의 기록을 각색한 것이다. ‘나’와 ‘정보원' 사이에서 수집된 증언의 기록들은 세속적 믿음과 오명, 이론의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발생한 사건을 대변하고, 군사 산업과 식민주의 역사에서 기원하는 불평등한 데이터는 은폐된다. 이에 작품은 데이터가 생산하는 지식에 따라 폭력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데이터란 궁극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지에 관한 모호한 과정을 추적한다.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의문점들을 죽음과 종말, 정체성의 갈등 등의 이야기와 엮어 풀어내는 서지수의 <untitled folder_portrait>(2024)는 디지털 이미지 ’커서’에 자의식을 부여하면서 시작된다. 특정 경험에 기반한 개인의 서사를 대리자인 커서에게 위임하며 디지털 화면 위 사진 데이터의 흔적을 들춘다. 하지만 화자가 집중하는 특정 인물들은 사진 이미지 데이터에서 식별 불가능한 블러 처리로 감춰지고, 기억을 안내하는 몇 가지 데이터 정보와 서술 이야기에만 의존해가며 비선형적인 서사를 그려나간다. 기억과 데이터 아카이브를 들추는 관객은 그곳으로부터 사적인 교류나 공감, 타인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며 자신의 자아와 연속성 안에 두려하지만, 커서의 건조한 움직임은 오히려 타인과의 심연의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작품은 개인의 역사에서 진실 여부나 사실성, 픽션의 경계를 떠나 커서의 움직임, 배열순서, 주어진 정보에만 집중하게 한다. 이것은 대리자 혹은 타인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함과 동시에 거부한다. 커서는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영상 마지막 장면에서 커서의 초상이 드러나며 데이터 주권의 회복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를 대리하는 데이터 환경에서 주체들 간의 관계가 실제 현실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혹은 수량적 계측을 통하여 어떤 보편성이 획득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답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데이터는 편파적이고 불분명하며 비가독적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야망을 간신히 감추면서 눈에 보이는 수치로 드러나고, 때로는 완전한 노이즈나 글리치 같은 것으로 분류되기도 하여 현실을 재구성, 재생산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제약적이고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자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한다.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반문하며, 다시 균열의 공간을 의심하고 들여다볼 것이다.

 

 

 

스크리닝 & 토크 타임라인

  • 서기준, <네오-펠로폰네서스에서의 전송>, 10'30"
  • 박지오, <모두를 위한 레즈비언 선언문>, 2'30"
  • 박지오, <무덤에서 요람까지>, 4'00"
  • 홍수진, <No.157>, 11'45"
  • 서지수, <untitled folder_portrait>, 13'30"
  • 아티스트 토크: 박지오, 서기준, 서지수, 홍수진, 서예원